컴퓨터의 역사
컴퓨터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컴 퓨터의 기원은 인류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작은 돌을 모아 늘어 놓던 시기까지 거슬 러 올라갈 수 있다. 즉, 실제적인 물체를 이용하여 추상적인 개념으로 수량을 계산하 고, 또 계산결과를 보존하는 것이다.
컴퓨터 이전에도 계산기는 있었다. 동양에는 주판이 있었고, 20 세기초반 까지만 해도 웹스터 사전에는 컴ㅍ쥬터가 계산하는 사람 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계산자라 는 것과 계산 표를 이용하여 복잡한 계산을 대신해주는 계산하는 직업이 있었던 것이 다. 로그도 사실은 복잡한 곱셈과 나눗셈을 덧셈 뺄셈으로 바꾸어 쉽게 손으로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가 있었다. 로그를 개발한 내피어라는 수학자는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는 계산원통 (계산자의 단순한 형태)을 개발하여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계산 원통으로 계산할 수 있는 숫자의 범위는 아주 좁았고, 적당한 계산기가 없는 인류의 계산 능력이 얼마나 빈약했는가 하는 츠측도 가능하게 해준다.
17세기의 유명한 과학자, 수학자인 파스칼은 부친이 세금 계산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 고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하였다. 톱니바퀴와 연동축으로 이루어진 이 기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계산기이다. 놀랍게도 이 계산기는 성능이 입증되었지만 대량으로 보 급되지 않았다. 이 기계가 대량 보급될 경우 회계원들의 실업이이 예상되어 회계원들 이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산화 과정에서 오늘날의 산업체가 겪은 상황과 비슷 하다. 기능공과 용접 로봇, 워드 프로세서와 타자수, 이런 신기술과 전통적인 직업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라이프니쯔는 이 새로운 계산기에 관심을 가지고, 곱셈과 나눗셈도 가능한 톱니 바퀴식 계산기의 원리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파스칼의 계산기가 가지고 있던 덧 셈과 뺄셈 기능에 완벽한 곱셈, 나눗셈 기능을 더했지만 실제 제작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특히 라이프니쯔는 10개의 톱니바퀴를 쓰는 10진법 계산기가 아니라, 2 진법 의 응용에도 동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진법을 응용하여 계산기를 만 들어냈다면.... 역사는 또 바뀌었을 것이다.
18세기의 마지막에 영국의 찰스 바베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전자동 계산기 연구에 쏟아 부어 1821 년 자신의 시제품을 영국 왕실 천문학회에서 발표하여 학회 최초의 금상을 수상하였다. 바베지는 보다 본격적인 자동 계산기 (계산 결과가 종이에 찍혀 나오는 것을 구상했다고 함.)를 만들기 위해 정부 지원을 받아가며 톱니 바퀴식 difference machine 을 제작하다가 자신의 발명품이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하 다는 것을 깨닫는다. 찰스 바베지는 컴퓨터의 이론으로 눈을 돌려 당시까지는 주어진 한가지 일만을 해주는 계산기를 만들려 했던 정설을 뒤엎고 일반적인 여러 문제에 사 용할 수 있는 범용 계산기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그는 이것을 analytical engine 이 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프로그램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찰스 바베지를 이해한 사람중에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에이다(ADA) 가 있었다. 그녀는 미모와 지식, 교양을 겸비한 20대의 백작부인으로 찰스 바베지를 여러모로 도와주고, 찰스 바베지와 그의 계산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그녀는 컴퓨터가 프로그 램에 따라 사람을 돕는 도구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적어 놓고 있다. 불행히 도 에이다는 36세에 요절하였고, 다른 영국인들과 영국 정부는 찰스 바베지를 쓸모 없 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것 뿐이라고 비난하였다.
미국은 1880년 11번째 인구 센서스를 실시하였으나 4년이 지나도록 그 통계처리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7년후인 1887년 경에야 결과의 윤곽이 나왔으나 이미 통계자료로서의 가치는 없었고, 다음번 인구 센서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모 결과 색상 카드 방식, 토큰 방식, 천공 카드 (punch card) 시스템이 최총 후보로 올랐다. 이들 셋을 시험해본 결과 같은 양의 데이타를 처리하는데 색상 카드 방식은 55시간, 토큰 방식은은 44시간, 천공카드 시스템은 5시간 반이 걸렸다. 허먼 홀로리스가 제안한 천공 카드 시스템은 빳빳한 종이 카드에 구멍을 뚫어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이었다. 프랑스인 재카아드가 시험 제안한 방법을 미국에서 상용화 한 이 방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890년의 미국 인구 센서스는 6주만에 결과가 나왔고, 홀러리스는 자신의 천공 카드 판독 시스템인 tabulating system 으로 회사를 만들어 수많은 통계처리와 회사 자문을 하였다. 그 회사는 오늘의 IBM의 전신이다.
산업혁명이 지나고, 기계공작 기술이 발전하고, 통계에 대한 요구가 다시 늘어 나면서 사람들은 계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IBM 이나 벨 전화회사 같은 곳에서, 영국에서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어링이, 독일에서는 콘라드 쥬스 라는 기술자가 지금의 컴퓨터와 비슷한 기계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콘라드 쥬스는 범용 계산기와 이진법 사용, 못쓰는 35 미리미터 필름에 구멍을 뚫어 프로그램을 입력했고 (최초의 테이프 입력장치) 전기식 릴레이를 스위치로 사용하였다. 그 가 집에서 혼자 만든 계산기는 Z1 이라는 이름으로 집 전체를 차지하였고, 개량형 Z2 를 만들었으며 헬무트 슈레이어라는 전기공학 박사가 그당시 새로운 진공관을 써서 스위치를 만드는 것이 전기식 릴레이보다 더 낫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나 이차대전의 발발과 히틀러의 자만으로 이들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예산은 확보하지 못했다. 두 사ㅏ람이 독일 정부에 계산기 제작 기금을 요청했을때 독일 정부는 너무 오래 걸린다고 요청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쥬스는 자신의 시작품인 Z4만을 가지고 알프스 산속에 숨어 들었다가 나중에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 수학과 조교수인 하워드 에이콘이 바베지의 연구를 분석하여 바베지의 어낼리티컬 엔진을 새로운 기술로 흉내내고자 하였다. 당시 여러 단일 용도의 계산기를 묶어 팔아 범용 계산기 역할을 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IBM 사의 토마스 왓슨 사장과 협력관계를 찾던 에이콘은 왓슨 사장이 이진법 사용을 전제로 백만불을 출자하게 만들었다. 에이콘은 전자식 릴레이를 이용하여 범용 계산기를 만들었다. 하버드 마크원이라고 불린 이 계산기는 길이 55피트 (1피트는 30 센티미터), 높이 8피트되는 거대한 기기 였다. 계 내부의 소음으로 매우 시끄러웠던 이 기계는 IBM 사가 컴퓨터 업계에 선두로 나서는데 한목하였다.
영국은 이차대전 와중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계산기를 개발하였다. 영국 정부는 극비리에 전자공학 전문가들과 수학자들을 동원하여 암호분석 작업을 할 계산기를 개발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에이콘이나 쥬스의 모델과 마찬가지로 전자석 릴레이를 사용하고, 종이 테이프를 빛으로 읽는 방식의 히드 로빈슨이라는 별명의 계산기를 만들었다. 그후 진공관을 사용하는 콜로서스 시리즈를 만들었고 2천개의 진공관으로 움직이는 콜로서스는 초당 5천자의 자료를 입력할 수 있었다. 영국은 이차대전동안 모두 10대의 콜로서스를 만들었다. 이들은 독일의 암호를 분석하고 있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아무도 독일군의 암호기계 에니그마가 만들어내는 암호가 고속으로 해석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영국의 연구 상황을 모르던 미국 펜실베니아주 무어 공과대학에서는 존 모클리와 크리스토퍼 액커트가 신병기의 탄도 거리 계산 등의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범용 계산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들은 30개월의 연구 끝에 1946년 2월 ENIAC 이라는이진법 계산기를 만들었다. 만구천개의 진공관과 그에 필요한 발전소 한채 분량의 전력, 엄청난 열과 수시로 망가지는 진공관을 갈아 끼우면서 에니악은 사용되었다. 또한 천재 수학자인 폰 노이만은 프로그램 기억 방식을 생각해내어 현대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지금의 컴퓨터와 원리적으로는 동일한 컴퓨터의 개념이 완성된 것이다. 이제 기술자들은 보다 작고 가볍고 편리한 소자들을 찾아내면 되었다. 그것은 바로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였고, 그 이후의 변화는 바로 오늘의 컴퓨터가 있게 하였다.
애플사는 애플 II 개인용 컴퓨터로 전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고, 1984년 매킨토시 컴퓨터를 통해서 마우스와 메뉴바, 작업창을 여러개 여는 방식의 컴퓨터 사용 인터페이스를 내놓았다. 대형 컴퓨터만을 생산하던 IBM 사도 개인용 컴퓨터를 내놓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매킨토시를 흉내내어 여기에 사용될 윈도우즈 운영체제를 내놓아 일반인들도 쉽게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Creative commons 2008 이영식
컴퓨터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컴 퓨터의 기원은 인류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작은 돌을 모아 늘어 놓던 시기까지 거슬 러 올라갈 수 있다. 즉, 실제적인 물체를 이용하여 추상적인 개념으로 수량을 계산하 고, 또 계산결과를 보존하는 것이다.
컴퓨터 이전에도 계산기는 있었다. 동양에는 주판이 있었고, 20 세기초반 까지만 해도 웹스터 사전에는 컴ㅍ쥬터가 계산하는 사람 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계산자라 는 것과 계산 표를 이용하여 복잡한 계산을 대신해주는 계산하는 직업이 있었던 것이 다. 로그도 사실은 복잡한 곱셈과 나눗셈을 덧셈 뺄셈으로 바꾸어 쉽게 손으로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가 있었다. 로그를 개발한 내피어라는 수학자는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는 계산원통 (계산자의 단순한 형태)을 개발하여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계산 원통으로 계산할 수 있는 숫자의 범위는 아주 좁았고, 적당한 계산기가 없는 인류의 계산 능력이 얼마나 빈약했는가 하는 츠측도 가능하게 해준다.
17세기의 유명한 과학자, 수학자인 파스칼은 부친이 세금 계산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 고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하였다. 톱니바퀴와 연동축으로 이루어진 이 기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계산기이다. 놀랍게도 이 계산기는 성능이 입증되었지만 대량으로 보 급되지 않았다. 이 기계가 대량 보급될 경우 회계원들의 실업이이 예상되어 회계원들 이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산화 과정에서 오늘날의 산업체가 겪은 상황과 비슷 하다. 기능공과 용접 로봇, 워드 프로세서와 타자수, 이런 신기술과 전통적인 직업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라이프니쯔는 이 새로운 계산기에 관심을 가지고, 곱셈과 나눗셈도 가능한 톱니 바퀴식 계산기의 원리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파스칼의 계산기가 가지고 있던 덧 셈과 뺄셈 기능에 완벽한 곱셈, 나눗셈 기능을 더했지만 실제 제작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특히 라이프니쯔는 10개의 톱니바퀴를 쓰는 10진법 계산기가 아니라, 2 진법 의 응용에도 동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진법을 응용하여 계산기를 만 들어냈다면.... 역사는 또 바뀌었을 것이다.
18세기의 마지막에 영국의 찰스 바베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전자동 계산기 연구에 쏟아 부어 1821 년 자신의 시제품을 영국 왕실 천문학회에서 발표하여 학회 최초의 금상을 수상하였다. 바베지는 보다 본격적인 자동 계산기 (계산 결과가 종이에 찍혀 나오는 것을 구상했다고 함.)를 만들기 위해 정부 지원을 받아가며 톱니 바퀴식 difference machine 을 제작하다가 자신의 발명품이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하 다는 것을 깨닫는다. 찰스 바베지는 컴퓨터의 이론으로 눈을 돌려 당시까지는 주어진 한가지 일만을 해주는 계산기를 만들려 했던 정설을 뒤엎고 일반적인 여러 문제에 사 용할 수 있는 범용 계산기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그는 이것을 analytical engine 이 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프로그램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찰스 바베지를 이해한 사람중에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에이다(ADA) 가 있었다. 그녀는 미모와 지식, 교양을 겸비한 20대의 백작부인으로 찰스 바베지를 여러모로 도와주고, 찰스 바베지와 그의 계산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그녀는 컴퓨터가 프로그 램에 따라 사람을 돕는 도구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적어 놓고 있다. 불행히 도 에이다는 36세에 요절하였고, 다른 영국인들과 영국 정부는 찰스 바베지를 쓸모 없 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것 뿐이라고 비난하였다.
미국은 1880년 11번째 인구 센서스를 실시하였으나 4년이 지나도록 그 통계처리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7년후인 1887년 경에야 결과의 윤곽이 나왔으나 이미 통계자료로서의 가치는 없었고, 다음번 인구 센서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모 결과 색상 카드 방식, 토큰 방식, 천공 카드 (punch card) 시스템이 최총 후보로 올랐다. 이들 셋을 시험해본 결과 같은 양의 데이타를 처리하는데 색상 카드 방식은 55시간, 토큰 방식은은 44시간, 천공카드 시스템은 5시간 반이 걸렸다. 허먼 홀로리스가 제안한 천공 카드 시스템은 빳빳한 종이 카드에 구멍을 뚫어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이었다. 프랑스인 재카아드가 시험 제안한 방법을 미국에서 상용화 한 이 방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890년의 미국 인구 센서스는 6주만에 결과가 나왔고, 홀러리스는 자신의 천공 카드 판독 시스템인 tabulating system 으로 회사를 만들어 수많은 통계처리와 회사 자문을 하였다. 그 회사는 오늘의 IBM의 전신이다.
산업혁명이 지나고, 기계공작 기술이 발전하고, 통계에 대한 요구가 다시 늘어 나면서 사람들은 계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IBM 이나 벨 전화회사 같은 곳에서, 영국에서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어링이, 독일에서는 콘라드 쥬스 라는 기술자가 지금의 컴퓨터와 비슷한 기계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콘라드 쥬스는 범용 계산기와 이진법 사용, 못쓰는 35 미리미터 필름에 구멍을 뚫어 프로그램을 입력했고 (최초의 테이프 입력장치) 전기식 릴레이를 스위치로 사용하였다. 그 가 집에서 혼자 만든 계산기는 Z1 이라는 이름으로 집 전체를 차지하였고, 개량형 Z2 를 만들었으며 헬무트 슈레이어라는 전기공학 박사가 그당시 새로운 진공관을 써서 스위치를 만드는 것이 전기식 릴레이보다 더 낫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나 이차대전의 발발과 히틀러의 자만으로 이들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예산은 확보하지 못했다. 두 사ㅏ람이 독일 정부에 계산기 제작 기금을 요청했을때 독일 정부는 너무 오래 걸린다고 요청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쥬스는 자신의 시작품인 Z4만을 가지고 알프스 산속에 숨어 들었다가 나중에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 수학과 조교수인 하워드 에이콘이 바베지의 연구를 분석하여 바베지의 어낼리티컬 엔진을 새로운 기술로 흉내내고자 하였다. 당시 여러 단일 용도의 계산기를 묶어 팔아 범용 계산기 역할을 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IBM 사의 토마스 왓슨 사장과 협력관계를 찾던 에이콘은 왓슨 사장이 이진법 사용을 전제로 백만불을 출자하게 만들었다. 에이콘은 전자식 릴레이를 이용하여 범용 계산기를 만들었다. 하버드 마크원이라고 불린 이 계산기는 길이 55피트 (1피트는 30 센티미터), 높이 8피트되는 거대한 기기 였다. 계 내부의 소음으로 매우 시끄러웠던 이 기계는 IBM 사가 컴퓨터 업계에 선두로 나서는데 한목하였다.
영국은 이차대전 와중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계산기를 개발하였다. 영국 정부는 극비리에 전자공학 전문가들과 수학자들을 동원하여 암호분석 작업을 할 계산기를 개발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에이콘이나 쥬스의 모델과 마찬가지로 전자석 릴레이를 사용하고, 종이 테이프를 빛으로 읽는 방식의 히드 로빈슨이라는 별명의 계산기를 만들었다. 그후 진공관을 사용하는 콜로서스 시리즈를 만들었고 2천개의 진공관으로 움직이는 콜로서스는 초당 5천자의 자료를 입력할 수 있었다. 영국은 이차대전동안 모두 10대의 콜로서스를 만들었다. 이들은 독일의 암호를 분석하고 있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아무도 독일군의 암호기계 에니그마가 만들어내는 암호가 고속으로 해석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영국의 연구 상황을 모르던 미국 펜실베니아주 무어 공과대학에서는 존 모클리와 크리스토퍼 액커트가 신병기의 탄도 거리 계산 등의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범용 계산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들은 30개월의 연구 끝에 1946년 2월 ENIAC 이라는이진법 계산기를 만들었다. 만구천개의 진공관과 그에 필요한 발전소 한채 분량의 전력, 엄청난 열과 수시로 망가지는 진공관을 갈아 끼우면서 에니악은 사용되었다. 또한 천재 수학자인 폰 노이만은 프로그램 기억 방식을 생각해내어 현대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지금의 컴퓨터와 원리적으로는 동일한 컴퓨터의 개념이 완성된 것이다. 이제 기술자들은 보다 작고 가볍고 편리한 소자들을 찾아내면 되었다. 그것은 바로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였고, 그 이후의 변화는 바로 오늘의 컴퓨터가 있게 하였다.
애플사는 애플 II 개인용 컴퓨터로 전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고, 1984년 매킨토시 컴퓨터를 통해서 마우스와 메뉴바, 작업창을 여러개 여는 방식의 컴퓨터 사용 인터페이스를 내놓았다. 대형 컴퓨터만을 생산하던 IBM 사도 개인용 컴퓨터를 내놓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매킨토시를 흉내내어 여기에 사용될 윈도우즈 운영체제를 내놓아 일반인들도 쉽게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Creative commons 2008 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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